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우리아 왕조 (문단 편집) === 쇠퇴와 멸망 === 장장 3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재위한 아소카 대왕은 72세를 일기로 기원전 232년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아소카 왕의 죽음에 관련해 얽힌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직감한 아소카 왕은 국고를 봉인하고 사재를 털어 사찰들에 대규모 기부를 퍼부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부처에게 바쳤기에 죽기 직전의 아소카 왕에게 남은 것은 가자나무 열매 반쪽 뿐이었다고 한다. 아소카 왕은 이 열매 반쪽마저 자신의 마지막 보시(布施)로 삼아 부처에게 바쳤다. 왕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7일 밤낮으로 화장되었다.] 탁월한 군재(軍才)로 인도를 휘어잡던 아소카 왕이 사망한 이후, 마우리아 왕조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아소카 왕이 당시 기준으로 워낙 오래 살았기에 아들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장자인 마힌다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버렸고, 쿠날라 마우리아는 [[장님]]이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티발라는 아버지보다도 먼저 죽었다. 때문에 아소카 사후 왕위에 오른 인물은 아소카의 손자였던 '''다사라타 마우리아'''였다. 다사라타 마우리아 치하의 마우리아 왕조는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황제의 숙부인 잘라우카 마우리아가 [[카슈미르]] 지방에 독립 왕국을 세워 떨어져나가는가 하면 [[간다라]] 지방에서는 왕자들 중 하나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서 먼 지방들부터 잃어갔다. 가장 먼저 아소카 대왕 시절 점령한 남인도와 중부 인도의 토착 세력들, 가장 대표적으로 [[사타바하나 왕조]]가 마우리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독립해나갔다. 또한 [[헬레니즘]] 왕국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인더스 강]] 유역에 대한 마우리아의 영향력도 점차 약해졌다고 한다. 기원전 224년에 다사라타 마우리아가 사망하자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왕이 되었다. 삼프라티 마우리아는 장님이었기에 왕이 되지 못했던 쿠날라 마우리아의 아들로, 아소카 대왕 사후 유일하게 [[명군]] 축에 낄 수 있는 군주였다. 삼프라티는 선왕 다사라타 시절 잃어버린 영토들 중 상당수를 재정복했고, [[마하라슈트라]], [[마이소르]], 안드라, [[구자라트]] 남부 지방들을 다시 마우리아 아래에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이나교]]의 철저한 신봉자였던 삼프라티는 할아버지 아소카 대왕의 불교 장려 정책을 폐지하고 자이나교 위주의 종교 정책을 펼쳤다. 다만 불교나 자이나교나 해외로의 선교사 파견만큼은 멈추지 않았던지 인도의 불교, 자이나교 포교는 삼프라티 마우리아 시기까지 쭉 계속되었다고 한다. 삼프라티는 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삼프라티 재위기 마우리아 왕조는 파멸적인 재앙이나 대전쟁은 겪지 않았으나 서서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쇠락한다. 기원전 215년에는 '''살리수카'''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13년 동안 재위했다는 것, 그리고 상당한 [[암군]]에 성격도 좋지 못했고 잔인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기원전 202년에 왕위에 오른 '''데바바르만 마우리아''' 역시 전임자를 그대로 닮았다고 한다. 손속이 잔인하고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니 수많은 세력들이 마우리아 왕조에게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갔다.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던 마우리아 왕조의 막대한 영토는 갈수록 쪼그라들어갔고, 아소카 대왕 시절 대제국의 영광은 찾아볼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재앙에 가까웠던 데바바르만 왕의 7년 치세가 끝난 이후 기원전 195년 '''사타단반 마우리아'''가 새 왕에 즉위했다. 사타단반 마우리아 역시 별다른 업적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8년이라는 짧은 세월 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기원전 187년에는 마우리아 최후의 왕인 '''브리하드라타''' 왕이 즉위했다. 브리하드라타 왕은 즉위 직후부터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력이 약해지면서[* 몇몇 학자들은 평화주의를 중시한 불교 신자 [[아소카 대왕]] 때문에 마우리아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비좁은 산악 통로, 즉 [[페샤와르]]의 방비 역시 자연스레 허술해졌다. 서쪽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이 기회다 싶어 마우리아를 침공했고,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인도 북동부 지방을 먹어치우고 기원전 180년 즈음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이들은 불교를 장려하는 등 나름대로 원주민들과 융화하면서 살아갔으나 기원전 70년 경 [[인도-스키타이]]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결국 기원전 185년에 휘하 장군이었던 푸샤미트라 슝가가 쿠데타를 일으켜 브리하드라타를 죽이고 [[슝가 왕조]]를 세우면서 마우리아 왕조는 139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구전에 의하면 푸샤미트라는 일부러 브리하드라타 왕을 전 군대가 보고있는 사열식 행사 도중 죽여버렸다고 한다.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새롭게 들어선 슝가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가 차지하고 있었던 인도 북동부 지방의 광활한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참고로 푸샤미트라는 약 36년을 재위했고, 왕위를 아들인 아그니미트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그니미트라 사후 슝가 왕조는 빠르게 쇠퇴했고, 마우리아 시절의 남인도와 서인도 지방은 아예 모조리 잃어버렸다. 게다가 북동부 인도 지방에서도 사실상 대부분의 행정구역들이 독자적으로 행세하면서 슝가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기원전 75년 경에 마지막 왕 데바후티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힌다는 이유로 [[슝가 왕조]]의 대신(大臣) 바스데바에게 암살당하면서 멸망한다. 슝가 왕조 이후 [[칸바 왕조]]가 수도인 파탈리푸트라를 물려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